[K Voice Today=김선엽 기자] 미국 내 보행자 사망 사고가 2009년 이후 75% 급증하며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뉴욕타임스(NYT)가 연방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사고 데이터 등을 분석한 결과, 이러한 급증의 배경에는 대형 SUV와 픽업트럭의 유행과 이에 따른 ‘차량 보닛 높이의 상승’이 직격탄을 날린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신장이 작은 보행자나 어린이일수록 사고 시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됐다.
보행자 사고 시 차량의 외형 구조는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과거 세단 중심의 도로 환경에서는 차량 전면부가 보행자의 골반이나 다리를 먼저 충격했다. 이 경우 보행자가 충격을 흡수하도록 설계된 보닛 위로 튕겨 올라가 차체에 부딪히기 때문에 생존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최근 출시되는 대형 SUV나 픽업트럭은 전면부 보닛 높이가 평균 4피트(약 122cm)에 육박하며 형태도 수직에 가깝게 각진 구조를 띤다. 이 같은 대형 차량과 충돌하면 보행자는 보닛 위로 피하지 못하고 가슴이나 머리를 정면으로 가격당한다. 충격 직후 보행자는 아스팔트 노면으로 강하게 튕겨 나가 쓰러지며, 높은 차체 아래로 말려 들어가 바퀴에 깔리는 2차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
이러한 물리적 특성은 키가 작은 보행자에게 가혹한 결과를 낳았다. 뉴욕타임스 분석 모델에 따르면 차량 보닛 높이가 1인치(약 2.5cm) 높아질 때마다 보행자의 사망 확률은 2.8%씩 상승했다.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의 연구에서도 보닛 높이가 40인치(약 101.6cm)를 넘고 전면부가 수직인 차량은 보닛 높이가 30인치 이하인 소형차에 비해 보행자 사망 위험이 44%나 높았다. 미국 성인 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5피트 6인치(약 167cm) 미만의 키 작은 성인들과 어린이들은 대형 차량 충돌 시 구조적으로 상반신 전체를 강타당할 수밖에 없다.
차량이 거대해지면서 운전자의 사각지대가 넓어진 점도 사고율을 키웠다. 보닛이 높고 평평해지면서 차량 바로 앞의 시야가 차단됐으며, 전복 사고 시 탑승객을 보호하기 위해 차량 기둥(A필러)과 사이드미러가 두꺼워져 좌회전이나 교차로 주행 시 보행자를 발견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3차원 스캐너 분석 결과 쉐보레 실버라도 등 주요 픽업트럭의 사각지대는 1990년대 말 이후 최대 두 배까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실험에서 대형 차량 운전자는 차량 전면에 서 있는 9세 이하의 어린이를 전혀 식별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자동차 제조사와 규제 당국이 탑승자 안전에만 치중한 결과 도로 위의 가장 취약한 계층인 보행자의 안전을 외면했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대형 SUV와 픽업트럭의 보닛 높이가 2000년대 초반 수준을 유지했거나 3인치(약 7.6cm)가량만 더 낮았어도 지난 8년간 약 3,000명의 보행자가 목숨을 건졌을 것이라는 추정을 내놓았다.
미국 내 픽업트럭과 SUV 비중이 높은 중서부뿐만 아니라 글로벌 전역에서 SUV 열풍이 불고 있는 만큼, 보행자 보호를 위해 신차의 보닛 높이를 법적으로 제한하거나 차량 무게 및 크기에 따라 차등적인 세금과 주차요금을 부과하는 등 강도 높은 교통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