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Voice Today=김선엽 기자] 미국 연방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에 최종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트럼프 행정부는 하루 만에 임신한 외국 여성의 미국 입국 자체를 차단하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며 논쟁의 무대를 옮기고 있다.
연방대법원은 6월 30일 9명의 대법관 중 6대 3 의견으로, 미국에서 태어난 아동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헌법상 권리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번 사건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월 취임 직후 서명한 행정명령에서 비롯됐다. 해당 명령은 부모가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아닌 경우, 자녀가 미국 땅에서 태어나더라도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도록 연방기관에 지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수 의견을 쓴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수정헌법 14조와 1898년 ‘미국 대 웡 킴 아크’ 판례를 근거로, 미국에서 태어나 그 관할권 아래 있는 사람은 시민권을 가진다는 원칙이 100년 넘게 유지돼 왔으며 이를 뒤집을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이번 다수 의견에는 보수 성향의 로버츠 대법원장과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이 참여했고, 브렛 캐버노 대법관은 연방법 위반이라는 별개 논리로 무효화에 동참했다. 반면 새뮤얼 얼리토, 클래런스 토머스, 닐 고서치 대법관은 반대 의견을 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판결 직후 유감을 표하며, 헌법 개정 대신 의회가 실질적으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입법에 즉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 매체 악시오스는 7월 1일 보도에서, 대법원 패소 직후 트럼프 대통령 참모진과 핵심 지지층인 ‘마가'(MAGA) 세력이 빠르게 다른 방안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전했다. 이들이 새롭게 제시한 방안은 임신한 외국 여성의 미국 입국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 이민정책을 설계해온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은 판결 다음 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비록 일시적 입국이라 해도 이제 누가 미국에 들어오는지 매우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보수 매체 페더럴리스트의 창립자 숀 데이비스도 같은 주장을 폈으며, 행정부 인사들 사이에서도 이런 구상이 흘러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도 이런 기류에 힘을 보탰다. 에비게일 잭슨 백악관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선천적 시민권의 가치를 지키는 데 전념하고 있으며, 이것이 판결 이후 의회에 즉각적인 조치를 지시한 이유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법무부가 원정출산(birth tourism) 알선 단속 수사를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악시오스는 이번 구상이 임신·여행·시민권을 둘러싼 새로운 이민 논쟁을 촉발할 것이며, 논의의 초점이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의 권리’ 문제에서 ‘누가 미국에 입국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법무부의 이번 지시는 새로운 움직임이 아니다.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이미 지난 4월 전국 국토안보수사국(HSI) 요원들에게 내부 지침을 내려 원정출산 단속 작전에 집중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번 조치는 임신한 외국인이 미국에서 출산해 자녀에게 시민권을 얻게 하려는 목적의 여행을 조직적으로 알선하는 네트워크 적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는 원정출산 자체를 전면 금지하는 별도 법률은 없다. 다만 트럼프 1기 시절인 2020년 도입된 연방 규정이 신생아 시민권 취득을 주된 목적으로 관광·상용(B-1/B-2) 비자를 쓰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어, 단속의 초점은 정상적인 방문이 아니라 비자 목적을 속이거나 이를 상업적으로 알선한 사기 행위에 맞춰질 가능성이 크다.
과거 실제 기소 사례로는 2019년 남가주 어바인을 중심으로 중국인 부유층을 겨냥한 ‘출산 숙소’를 운영한 조직이 대거 기소된 건이 있다. 핵심 인물인 둥위안 리는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는 미국 내 첫 원정출산 관련 연방 기소 사례로 기록됐다.
원정출산 규모에 대한 공식 통계는 없다. 보수 성향 싱크탱크인 이민연구센터는 2016~2017년 기준 연간 2만~2만5000명 수준으로 추산한 바 있다. 한국경제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 태어나는 아기는 연간 약 360만 명이며, 이 중 부모 모두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는 경우는 약 9%(약 32만 명, 2023년 퓨리서치센터 추정)로, 이 안에는 불법체류자 자녀뿐 아니라 학업·사업 등 합법 비자 소지자의 자녀도 다수 포함된다.
‘임신부 입국 차단’이라는 발상은 시행 방법을 둘러싼 근본적 의문과 함께 인권 침해 우려를 동시에 낳고 있다.
전국여성법률센터(NWLC)의 케이티 오코너 연방 낙태정책 선임국장은 누가 임신했는지, 임신이 몇 주 차인지에 관한 정보가 연방 정부는 물론 주 정부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위험한 제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입국 심사 과정에서 단순히 임신 여부를 묻는 수준에 그칠 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며, 행정부가 실제로 어떤 방식을 택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우려를 표했다.
현장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만만치 않다. 입국 심사관이 임신 여부와 주수를 정확히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오진이나 자의적 판단에 따른 입국 거부는 어떻게 다툴 것인지 등 구체적 실행 방안은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국토안보부(DHS)는 그동안 미국에서 출산하는 행위 자체는 불법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관련 법 위반 여부에는 엄격히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연방의회에서 출생시민권 폐지 자체를 입법으로 관철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 정치권의 대체적 시각이다. 상원에서 필리버스터를 피하려면 60표 이상이 필요한데 현재 의석 구도로는 어렵고, 하원 공화당 의원들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히스패닉·아시아계 유권자의 반발을 우려해 적극 나서기 어려운 처지다.
이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는 헌법 개정이나 정면 입법 대신, 비자 심사·입국 심사·수사기관 단속이라는 행정적 수단을 통해 사실상 같은 효과를 노리는 우회 전략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시민자유연합(ACLU) 등 시민단체는 이번 판결을 환영하면서도, 출생시민권을 무력화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시도가 다른 형태로 계속될 것이라는 우려를 거두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