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Voice Today=김선엽 기자] 미국 연방대법원이 3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 핵심 축이었던 ‘출생지주의 시민권 폐지’ 행정명령에 위헌·위법 판단을 내렸다. 취임 첫날 서명된 행정명령이 1년 5개월간의 소송전 끝에 무력화되면서, 미국 영토에서 태어난 아이는 부모의 체류 신분과 무관하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취득한다는 158년 된 헌법 원칙이 재확인됐다.
이번 판결은 ‘Trump v. Barbara’ 사건(25-365)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2025년 1월 20일 취임 당일 서명한 행정명령 14160호(“미국 시민권의 의미와 가치 보호”)의 위헌성을 다툰 소송이다. 이 명령은 산모가 불법체류 신분이고 부친이 시민권자·영주권자가 아닌 경우, 혹은 산모가 유학생·취업비자 등 일시 체류 신분이고 부친 역시 시민권자·영주권자가 아닌 경우 자녀에게 시민권 서류를 발급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서명 직후 모든 하급심 판사가 이를 “명백히 위헌”이라 판단해, 이 명령은 단 한 번도 실제 발효되지 못했다. 대법원은 지난 4월 1일 구두변론을 열었으며 트럼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이례적으로 직접 방청했다.
이번 소송은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과 뉴햄프셔·메인·매사추세츠 등 각 주 ACLU 지부, 법적수호기금(LDF), 아시안로코커스(Asian Law Caucus), 민주주의수호기금(Democracy Defenders Fund) 등이 시민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놓인 아동들을 대리해 공동으로 제기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작성한 6대 3 다수의견은 식민지 시절 이주민들이 요구한 ‘영국인의 권리’와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옹호한 ‘고대적이고 보편적인’ 출생 시민권 원칙을 인용하며, “시민권이란 예나 지금이나 권리를 가질 권리, 즉 정치공동체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라고 밝혔다.
핵심 근거는 1898년 웡킴아크(Wong Kim Ark) 판례였다. 중국인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웡킴아크는 중국 방문 후 재입국을 거부당하자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고, 당시 대법원은 수정헌법 14조의 ‘관할권’ 문구를 외교관 자녀 등 극히 제한적 예외를 빼면 미국 출생자 전원에게 자동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원칙은 2차대전 중 일본계 강제수용소에서 태어난 신생아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만큼 확고했다. 로버츠 대법원장 의견에는 소토마요르·케이건·잭슨 대법관과 보수 성향 배럿 대법관이 합류했다.
브렛 캐버노 대법관은 행정명령이 수정헌법 14조 위반은 아니지만 연방 시민권법(8 U.S.C. §1401(a))을 위반했다는 별도 의견을 냈다. 이로써 무효 ‘결론’에는 6명이 동의했지만, 헌법 해석 자체를 둘러싼 ‘헌법적 다수’는 5명에 그쳤다.
클래런스 토마스 대법관은 고서치 대법관과 함께 91쪽 분량(다수의견의 3.5배 이상)의 반대의견을 냈다. 그는 시민권 조항이 인종과 무관하게 미국에 ‘거주(domicile)’하는 사람에게 시민권을 보장한 것이지, 거주하지 않는 사람까지 포괄한 것은 아니라며 다수의견이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에 잭슨 대법관은 소토마요르 대법관과 함께 낸 보충의견에서, 그간 ‘색맹적’ 헌법 해석을 옹호해온 토마스 대법관이 이제와 시민권 조항을 인종 의식적 구제조치로 축소 해석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반박했다.
사무엘 알리토 대법관은 다수의견을 “심각한 오류”라 칭하며 ‘원정출산(birth tourism)’ 자녀까지 시민권을 인정하는 해석을 거부했다. 그는 이번 판결이 불법 입국·체류의 유인을 그대로 보존하며, 원조격인 영국조차 포기한 “중세적 규칙”을 미국에 지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대법원이 출생시민권을 유지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의회 입법으로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며 “길고 다루기 힘든 헌법 개정은 필요 없다”고 썼다. 그는 “의회가 오늘부터 불공정한 출생시민권 폐지에 착수해야 한다”며 전폭적 지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실제 개정에는 상하 양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한 헌법 개정 절차가 필요해 통과 가능성은 극히 낮다. 공화당은 상원 53석뿐이라 법률 개정에 필요한 60표 확보도 어렵고, 존 튠 원내대표는 필리버스터 폐지 표조차 없다고 밝혀왔다.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은 이번 판결을 “대법원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결정 중 하나”라고 비판했다.
애덤 시프 상원의원(민주)은 “출생시민권은 논쟁 대상이 된 적이 없다”며 “이번 판결을 뒤집는 것은 이 편파적 대법원조차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민자 권익단체 ‘위아카사’는 대법원 앞에서 축하 집회를 열었고, ACLU 세실리아 왕 변호사는 이를 “축제”라 표현했다. ACLU 이민자권리프로젝트 코디 워프스키 부국장은 “대법원이 이를 단호히 거부한 만큼 2차 공방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이번 판결이 절차적 문제가 아니라 원정출산자·불법체류자 자녀에게도 시민권을 요구하는 실체적 판단이라며 “중대한 패배”로 평가했고, 마이크 리 상원의원은 “결국 헌법 개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행정명령 설계자 존 이스트먼 전 변호사는 예상보다 근소한 표결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캐버노 대법관의 별도의견을 근거로 의회 입법을 통한 해결 가능성에는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알렉스 파디야 상원의원(민주·캘리포니아)은 이번 판결을 “대법원이 오늘 아침 제대로 판단한” 결정이라며 환영했다.
이날 대법원은 학기 마지막 선고일을 맞아 각 주의 트랜스젠더 선수 여자스포츠팀 출전 금지 허용 판결과, 정당의 후보 지원 지출 한도를 폐지하는 판결도 함께 내렸다.이로써 대법원은 지난 2월 트럼프의 관세 정책 무효화에 이어, 2기 임기 핵심 정책을 두 번째로 무력화했다.
심층분석: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 미치는 영향
유학생·주재원·연구원 가정, 직격 위기 해소
이번 판결로 한인 커뮤니티는 1년 넘게 이어진 불확실성에서 벗어났다. 이 사안은 라틴계·남부 국경 이슈로만 인식되기 쉬웠지만, 실제로는 한인 사회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였다. 비영리단체 코리안 아메리칸 인스티튜트(KAI)의 정책 브리프에 따르면, 행정명령이 확정됐다면 유학생·주재원·연구원 등 합법 비자 소지 한국인 여성이 미국에서 출산해도 자녀가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할 상황이었다. 실제로 조지아·워싱턴DC 지역 이민 전문 변호사들에게는 출산을 앞둔 주재원 직원들의 문의가 크게 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녀가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하면 부모 비자에 종속되는 별도의 자녀 비자를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발급받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우려됐다.
KAI는 이민자 권리와 출생시민권 문제가 라틴계나 남부 국경 지역에만 국한된다는 통념을 바로잡고, 한인 사회에 미칠 실질적 위협을 미리 경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 사안은 단순한 법률 논쟁을 넘어 임신·출산을 앞둔 한인 가정의 구체적 생활 리스크로 이어져 왔다.
지역별 온도차 해소
한인 밀집 주인 조지아·텍사스·버지니아는 과거 하급심 소송 국면에서 행정명령 집행이 허용되는 지역군으로 분류돼 불안감이 컸던 반면, 캘리포니아·매사추세츠·메릴랜드 등은 효력정지가 유지되는 지역이었다. 이런 편차는 “이사를 가면 자녀가 시민권을 받을 수 있느냐”는 혼란스러운 문의로도 이어졌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이러한 지역별 편차 자체가 사라지고, 전국적으로 동일한 원칙이 다시 확립됐다.
실질적으로 해소되는 우려들
- 원정출산 불확실성 해소: 임신 중 미국 체류·출산을 계획했던 가정의 법적 불확실성이 해소됐다. 다만 이는 원정출산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며, 여전히 정치적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 행정절차 안정성: 부모의 체류신분 확인 절차 추가 우려가 있었으나, 기존처럼 이름·생년월일·주소지만으로 출생신고가 가능한 절차가 유지된다.
- 국적 문제는 별개: 미국 출생 한인 2세의 선천적 복수국적에 따른 한국 병역 관련 국적이탈 절차(만 18세가 되는 해 3월 31일까지)는 이번 판결과 무관하게 계속 유효하다. 시민권 취득 불확실성은 해소됐지만 복수국적 관리 부담은 남아있다.
남은 과제
트럼프 대통령이 입법 재추진 의사를 밝힌 만큼 완전히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신중론도 있다. 다만 상원 통과에 필요한 60표(혹은 필리버스터 폐지)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라 단기간 실질적 위협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법조계 대체적 평가다. ACLU 등도 이번 판결을 “명확하고 단호한” 결론으로 보며 재론 가능성을 낮게 본다. 결과적으로 이번 판결은 미주 한인 이민자·유학생·주재원 가정에게 지난 1년 반 가장 큰 불확실성 하나를 해소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