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Voice Today=김선엽 기자] 퇴근길 사거리에서 접촉사고가 났다. 차 뒤 범퍼가 살짝 찌그러졌을 뿐, 다친 사람도 없어 보인다. 상대 운전자가 먼저 다가와 “경찰까지 부를 필요 있나요, 제가 수리비 드릴게요”라고 제안한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악수로 마무리한다. 흔히 있을 법한, 그리고 실제로 많은 한인들이 겪는 장면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별일 아니겠지”가 부메랑이 되는 이유
미국 현지 법률 정보 사이트와 변호사 상담 사례들을 보면, 사고 직후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서 목이나 허리 통증 같은 지연성 부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차량 손상 역시 겉으로는 작아 보여도 정비소에서 뜯어보면 예상보다 큰 수리비가 나오는 일이 흔했다. 문제는 이 시점에는 이미 사고 현장이 사라지고 없어, 경찰이 새로 출동해 조사할 방법도, 근거로 삼을 공식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더 심각한 건 상대방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장에서 “제가 잘못했어요, 처리해 드릴게요”라고 말했던 상대가 나중에 말을 바꿔 오히려 책임을 부인하거나, 심지어 반대로 이쪽 과실을 주장하고 나서는 사례도 실제로 보고됐다. 목격자도, 서면 기록도 없는 상황에서는 결국 “그쪽 말과 이쪽 말”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진흙탕 싸움에서는 대개 증거를 갖춘 쪽이 유리했다.
미국 로스쿨 및 변호사 자문 사이트인 애보(Avvo)에 올라온 법률 답변은 이 점을 분명히 짚었다. 사고 후 경찰이나 보험사에 알리지 않기로 구두로 합의하는 것은 애초에 권장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결국 한쪽이 나중에 마음을 바꿔 경찰이나 보험사에 사고를 신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아무런 대비도 해두지 않은 다른 한쪽만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현금으로 조용히 끝내자”는 제안, 법적으로도 위험하다
일부 운전자는 아예 보험 처리 없이 현금이나 수표로 그 자리에서 끝내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얼핏 간편해 보이지만,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법률사무소 분석에 따르면 이런 방식은 법적으로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 비공식적으로라도 돈을 받는 순간 이는 구속력 있는 합의로 간주될 여지가 있고, 이후에 추가 차량 손상이나 부상이 발견되더라도 보험 청구나 소송이 이미 늦어버린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캘리포니아 법원은 손을 잡고 한 약속이라도 상대가 돈을 받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이를 유효한 합의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더해 각 주(州)마다 사고 신고 의무 규정이 따로 있다는 점도 간과하기 쉽다.
💡 각 주별 사고 신고 의무 규정
노스캐롤라이나주: 인명 피해가 발생했거나 차량 및 재산 피해액이 1,000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 사고는 즉시 경찰(Local Police, Sheriff, Highway Patrol)에 신고해야 하는 의무가 규정된 상태다. 경찰 조사를 거쳐 작성되는 “사고 리포트(DMV-349)”는 차량국(DMV) 제출 및 향후 과실 입증의 핵심 문서로 활용된다.
캘리포니아주: 재산 피해가 1,000달러를 넘거나 부상자가 있는 사고라면 반드시 주 차량국(DMV)에 SR-1 양식으로 신고하도록 법으로 정해졌다.
상대방이 “우리끼리 조용히 하자”고 해도 이 신고 의무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이를 어기면 면허 정지 등 별도의 행정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다.
보험사와 병원 기록, 결국 “증거 싸움”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최신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발생하는 교통사고는 연간 600만 건 이상에 달하며, 이 중 인명 피해가 없는 단순 재산 피해 사고만 매년 400만 건 넘게 보고됐다. 연간 약 240만 명이 사고로 인한 부상을 입는 것으로 집계된 만큼, 당장 외상이 없어 보여도 나중에 의료 기록이 필요한 상황이 얼마든지 발생했다.
미국 자동차보험 정보 매체 인슈어런스닷컴 역시 비슷한 조언을 내놓았다. 보험 청구 자체는 의무가 아니지만, 부상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경찰 리포트를 받아두는 편이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나중에 상대가 손해배상 소송을 걸어올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사고 현장의 상황과 합의 내용을 사진과 문서로 촘촘히 남겨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찰 리포트가 없다고 해서 보험 청구나 소송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여러 로펌의 설명을 종합하면, 경찰 리포트 없이도 보험사에 클레임을 제기하거나 민사소송을 진행하는 길은 열려 있었다. 그러나 리포트가 없으면 그만큼 사고 경위를 입증하는 부담이 고스란히 당사자에게 넘어오고, 상대가 진술을 뒤집을 경우 결국 목격자 확보나 병원 진료 기록, 정비소의 손상 감정서 등으로 하나하나 다시 증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랐다. 즉 “없어도 된다”와 “없어서 편하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권하는 3단계
한인 법조계와 미국 현지 법률 정보를 종합하면, 아무리 경미해 보이는 사고라도 다음 세 단계는 생략하지 않는 것이 좋다.
경찰 신고: 고속도로에서는 하이웨이 패트롤(Highway Patrol), 일반 도로에서는 해당 도시의 논-이머전시(non-emergency) 경찰 번호나 911로 연락해 사고를 접수한다. 나중에 보험금을 받을 때 경찰 리포트가 결정적인 근거 자료가 된다.
병원 또는 어전트케어 방문: 구급차 비용이 부담스러워 911을 부르지 않았다면, 응급실보다 비용이 저렴한 어전트케어(Urgent Care)를 찾는 것도 방법이다. 보험이 없어도 이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 사고와 부상의 인과관계를 남기는 의료 기록 자체가 나중에 필수 증거가 된다. 개인 의료보험이 있다면 우선 그 보험으로 치료받고, 이후 보험사가 교통사고로 인한 진료인지 확인해 오면 사실대로 답하면 된다. 그러면 의료보험사가 자동차 보험사를 상대로 구상권(Subrogation)을 청구하는 절차를 대신 밟아준다.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 상담: 미국 대부분의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는 승소 전까지 비용을 받지 않는 성공보수 방식으로 일한다. 어떤 증거와 기록을 모아야 하는지 안내해주고, 보험사를 상대로 한 협상도 대신 진행해준다. 한 한인 대상 법률 상담 코너에서도 사고 직후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경찰을 꼭 불러야 하나”, “보험사가 연락 왔는데 바로 합의해도 되나”라는 점을 지적하며, 혼자 판단해 성급히 결정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한국식 인정(人情)”이 통하지 않는 곳
한국에서는 작은 사고라면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웃으며 넘어가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송 사회이자 철저하게 서류와 증거로 말하는 사회다. 목소리가 크다고, 혹은 그 자리에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웃으며 악수했다고 해서 나중에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런 기록 없이 “말로 끝냈다”는 사실이 훗날 발목을 잡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민 생활 중 언제,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것이 교통사고다. 당황스러운 순간일수록 원칙을 지키는 것이 결국 나와 가족을 지키는 길이다.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되겠지”라는 판단이, 몇 달 뒤 훨씬 더 크고 값비싼 대가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