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Voice Today=김선엽 기자] 한국 화장품의 미국 진출 방식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개별 브랜드가 미국 유통업체를 하나씩 찾아가는 방식에서 벗어나 신세계백화점과 CJ올리브영 같은 국내 대형 유통 플랫폼이 여러 K뷰티 브랜드를 한데 묶어 미국 소비자와 유통 바이어에게 선보이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올리브영이 미국 세포라에 대규모 K뷰티 큐레이션을 선보인 데 이어 신세계백화점이 뉴욕 맨해튼 허드슨 야드에 약 2,100 square feet 규모의 K뷰티·K브랜드 팝업을 여는 등 한국 유통업체 자체가 미국 시장 진출의 ‘플랫폼’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Target과 Walmart 등 미국 대형 유통업체들도 한국 화장품 브랜드의 매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어, 미국 K뷰티 시장의 경쟁 구도가 개별 브랜드 중심에서 유통망·큐레이션·물류·규제 대응 능력을 갖춘 플랫폼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신세계, 뉴욕 허드슨 야드에 30여 개 브랜드
신세계백화점은 오는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뉴욕 맨해튼 허드슨 야드에서 ‘신세계 하이퍼그라운드 팝업’을 운영한다.
뉴욕 팝업은 약 2,100 square feet 규모로 조성되며, 국내 K뷰티와 K패션을 포함해 약 30개 브랜드가 참여한다. 매장은 스킨케어, 메이크업, 향수·헤어, 뷰티디바이스, 이너뷰티, 라이프스타일 기프트 등 6개 구역으로 구성된다.
허드슨 야드는 럭셔리 리테일과 식음료, 오피스, 주거시설 등이 들어선 뉴욕의 대표적인 복합개발 지역이다. 신세계는 이곳을 미국 첫 하이퍼그라운드 진출 지역으로 선정하고 현지 소비자와 유통업체 바이어에게 한국 브랜드를 직접 소개한다.
이번 사업에서 주목할 부분은 단순한 팝업 매장 운영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세계 하이퍼그라운드는 현지 소비자의 선호도를 조사하고 팝업 계약부터 물류, 매장 인테리어, 운영까지 지원한다. 팝업을 통해 현지 소비자뿐 아니라 유통업체 바이어와 접점을 만들고 향후 현지 유통사와의 파트너십으로 연결하는 구조다.
신세계는 2023년 11월 태국에서 하이퍼그라운드를 처음 선보인 이후 일본, 싱가포르, 프랑스 등에서도 팝업을 운영하며 한국 브랜드의 해외 소비자 접점을 확대해 왔다.
‘브랜드 하나’가 아니라 ‘브랜드 묶음’으로 미국 진출
이 같은 방식은 미국 시장에서 브랜드 하나씩 진입하는 기존 방식과 차이가 있다. 중소·신진 화장품 브랜드가 미국에 직접 진출하려면 현지 소비자 조사, 물류와 통관, 유통망 확보, 마케팅, 규제 대응 등 여러 과정을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반면 플랫폼 사업자는 여러 브랜드를 묶어 현지 시장에 공급할 수 있다. 특히 미국 소비자에게 생소한 한국 인디 브랜드의 경우 제품 자체를 알리는 것뿐 아니라 어떤 제품을 선택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큐레이션’이 중요하다. 이러한 역할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올리브영과 세포라의 협업이다.
올리브영, 미국 세포라 500곳 이상에 K뷰티 큐레이션
CJ올리브영은 지난 8월 20일부터 미국 세포라에서 ‘올리브영 K-뷰티 에딧’을 선보였다. 세포라 공식 발표에 따르면 올리브영과 세포라가 선정한 19개 한국 뷰티 브랜드가 미국 시장에 출시됐으며, 미국 내 500개 이상의 세포라 매장과 Sephora.com에서 판매된다. 뉴욕 타임스스퀘어 플래그십 매장에는 별도의 올리브영 K뷰티 공간도 마련됐다.
국내 보도에서는 미국 세포라 단독 매장 약 670곳 가운데 580곳에 숍인숍 또는 전용 매대 형태로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19개 브랜드에는 아비브, 아렌시아, 바닐라코, 비플레인, 바이오힐보, 셀퓨전씨, 메노킨, 리쥬란, 토리든, 휘피드 등이 포함됐다. 올리브영이 단순히 제품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피부 고민과 기능에 따라 분류해 보여주는 것도 특징이다. 뉴욕 타임스스퀘어 매장에서는 ‘Skin Reset’, ‘Boost & Glow’, ‘Advanced Actives’, ‘Mask Library’ 등 소비자가 자신의 피부 고민을 기준으로 제품을 찾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즉 미국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것은 단순히 19개 브랜드의 제품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어떤 제품을 어떻게 고르는가”라는 올리브영의 큐레이션 방식 자체인 셈이다.
올리브영, 미국에 직접 매장도 확대
올리브영의 미국 전략은 세포라 입점에만 머물지 않는다. 올리브영은 지난 5월 29일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미국 첫 오프라인 매장을 열고 미국 전용 온라인몰도 함께 선보였다. 올리브영 공식 자료에 따르면 패서디나점에는 약 400개 브랜드와 5,000개 이상의 제품이 입점했다. 6월 13일에는 로스앤젤레스 웨스트필드 센추리시티에 두 번째 미국 매장을 개점했다. 약 2,700 square feet 규모인 센추리시티점에서도 개장 전부터 약 330 feet에 이르는 대기줄이 형성됐다. 패서디나점 역시 개장 당일 약 1,300 feet에 이르는 대기줄이 형성되면서 현지에서 높은 관심을 받았다. 이는 올리브영이 미국에서 단순한 한국 화장품 수출업체가 아니라 수백 개 브랜드를 직접 큐레이션하고 판매하는 대형 뷰티 플랫폼으로 자리 잡으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Target·Walmart까지 K뷰티 매대 확대
올리브영과 신세계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Target은 올해 미국 600개 이상의 매장에 새로운 ‘Target Beauty Studio’를 선보였다. 해당 공간에는 약 90개 뷰티 브랜드와 1,600개 이상의 제품이 구성됐으며, 참여 브랜드 가운데 한국 브랜드도 포함됐다. Target은 올해 K뷰티 제품 구성을 크게 늘리면서 신규 브랜드와 제품을 지속적으로 추가하고 있다.
개별 한국 브랜드의 진출도 빨라지고 있다. APR의 메디큐브는 미국 Target 약 1,500개 매장에 진출한 데 이어 Walmart 약 3,000개 매장으로 유통망을 확대했다.
토니모리는 미국 Walmart 약 600개 매장, LG생활건강의 더페이스샵은 약 1,600개 Walmart 매장에 진출했다. 이 같은 변화는 K뷰티가 한국계 전문점이나 온라인 쇼핑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국 소비자가 일상적으로 방문하는 대형 유통망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의미다.
K뷰티 수출도 미국 중심으로 이동
플랫폼 경쟁이 본격화되는 배경에는 실제 미국 수요가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2026년 상반기 한국 화장품 수출액은 70억 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27.3% 증가했다. 국가별로는 미국이 14억5,000만 달러로 전체 수출의 20.7%를 차지하며 1위를 기록했다. 미국 수출액은 전년 동기보다 41.5% 증가했다. 중국은 10억1,000만 달러, 일본은 5억8,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중국 수출은 전년 동기보다 6.6% 감소한 반면 일본은 5.9% 증가했다. 미국은 지난해 처음 한국 화장품의 최대 수출국이 된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도 1위를 유지했다.
미국 화장품 시장 진출에는 MoCRA도 변수
미국 시장이 커지는 만큼 규제 대응도 중요해지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따르면 미국에서 화장품을 제조·가공하는 시설은 원칙적으로 시설 등록을 해야 하며, 미국에서 판매되는 각 화장품의 ‘책임자(Responsible Person)’는 제품을 FDA에 등록·리스팅해야 한다. 다만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소규모 사업자는 시설 등록과 제품 리스팅에서 일부 면제를 받을 수 있으며, 제품과 사업 구조에 따라 적용되는 요건도 달라진다. 따라서 한국의 중소·인디 브랜드가 미국에 직접 진출할 경우 제품 경쟁력뿐 아니라 FDA 규제, 라벨링, 안전성 자료, 통관과 물류 등을 함께 관리해야 한다.
올리브영과 같은 대형 유통 플랫폼은 이러한 미국 시장 진출 과정에서 물류·통관·유통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소 브랜드의 진입 부담을 낮추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만 이를 두고 “올리브영이 모든 브랜드의 MoCRA 절차를 대신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실제 규제상 책임 주체와 적용 요건은 제품과 사업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플랫폼에 올라간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플랫폼 중심의 미국 진출에는 과제도 있다. 첫째는 경쟁 심화다. 신세계 팝업 하나에 약 30개 브랜드가 참여하고 올리브영의 세포라 K뷰티 에딧에도 19개 브랜드가 동시에 등장한다. 미국 소비자의 선택지가 많아지는 만큼 개별 브랜드가 플랫폼 안에서 눈에 띄기는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둘째는 유통 비용과 마진 문제다. 플랫폼과 현지 유통망을 활용하면 미국 시장 진입이 쉬워지는 대신 제조사와 소비자 사이에 여러 유통 단계가 생길 수 있다. 이에 따라 브랜드가 직접 판매할 때와 비교해 수익 구조가 달라질 수 있다. 다만 구체적인 수수료율이나 마진 구조는 브랜드와 유통업체 간 계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셋째는 플랫폼 의존성이다. 중소 브랜드가 플랫폼을 통해 빠르게 인지도를 확보할 수 있지만 특정 유통망의 판매 정책이나 노출 방식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팝업 이후’
신세계의 허드슨 야드 팝업과 올리브영의 세포라 진출에서 중요한 것은 첫날의 방문객 숫자나 판매량만이 아니다. 팝업을 방문한 소비자가 제품을 다시 구매하는지, 현지 바이어가 정식 입점을 제안하는지, 재주문으로 이어지는지가 장기적인 미국 진출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 신세계가 하이퍼그라운드를 통해 현지 유통사와의 파트너십을 연결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다. 올리브영 역시 미국을 시작으로 세포라와의 K뷰티 협업을 다른 국가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결국 미국 K뷰티 시장의 경쟁은 누가 더 많은 한국 브랜드를 미국에 가져오느냐에서 누가 좋은 브랜드를 발굴하고, 소비자에게 설명하고, 유통·물류·규제 문제를 해결하며 재구매까지 연결하느냐로 이동하고 있다.
뉴욕 현지 채용도 시작
신세계는 뉴욕 하이퍼그라운드 팝업 운영을 위해 현지 관리자 채용도 진행하고 있다. 공개된 채용 내용에는 소매 유통 분야 경력과 K뷰티 산업에 대한 관심, 고객과의 소통 능력, 팀 리더십 등이 요구 조건으로 포함됐다. 다만 한인 커뮤니티 등에 공유된 별도의 현장 스태프 채용 내용 가운데 일부는 공식 채용 공고로 독립 확인되지 않은 만큼 구체적인 근무 장소와 조건은 실제 채용 공고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인 소비자에게는 ‘직접 보고 고르는’ 시대
미국 한인 소비자 입장에서는 K뷰티를 접할 수 있는 경로가 빠르게 늘고 있다. 서부 지역에서는 패서디나와 로스앤젤레스 센추리시티의 올리브영 매장을 직접 방문할 수 있고, 미국 전역의 세포라에서는 올리브영이 선정한 K뷰티 제품을 접할 수 있다.
Target과 Walmart에서도 한국 브랜드의 접근성이 높아지고 있다. 뉴욕에서는 10월 1일부터 허드슨 야드에서 신세계 하이퍼그라운드 팝업이 운영된다. 과거에는 한국에서 인기 있는 제품을 온라인으로 주문하거나 한인 유통망을 이용해야 했던 소비자들도 이제는 미국 현지 매장에서 제품을 직접 테스트하고 비교한 뒤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 브랜드에는 새로운 미국 진출 통로가 열리고, 소비자에게는 선택지가 넓어지는 동시에 브랜드 간 경쟁도 더욱 치열해지는 구조다.
K뷰티의 미국 진출은 이제 단순한 ‘한국 화장품 수출’에서 ‘한국 유통 플랫폼의 미국 시장 진출’로 단계가 바뀌고 있다. 신세계의 허드슨 야드, 올리브영의 세포라와 미국 직영점, Target과 Walmart의 대형 매장망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미국 K뷰티 시장의 다음 경쟁은 제품 하나의 인지도를 넘어 플랫폼 안에서 어떤 브랜드가 선택되고 살아남느냐에 초점이 맞춰질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