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반 아버지는 교인이 20명도 되지 않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셨습니다. 철없던 대학생 시절, 나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웠고 주일에 교회 가기 싫어서 술을 마시고 주일 새벽에 집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 번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차라리 뺨이라도 때리셨다면 그것을 핑계로 교회에 나가지 않을 명분이 생기는데 새벽까지 술 마시고 들어온 날에도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그러던 1976년 11월 21일 추수감사주일, 설교하시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그날 저녁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생 마음 아픈 것은 아버지에게 그 한마디 못한 것입니다.
70년대 초반 많은 이민 가정 10년 넘게 가족이 떨어져 살았는데 우리도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때 미국에 오셔서 고등학생 때 만나고 대학생 때 세상 떠나셨으니 고작 3년 아버지와 살았습니다. 아버지 떠나고 나는 하나님 욕하고 교회를 떠났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내게 “네가 장남이니 네가 챙겨라” 하시면서 아버지가 평양에서 월남하신 후 평생 쓰신 일기 박스를 주셨습니다.
아버지 일기를 읽다가 내가 그렇게 부끄럽게 여겼던, 월급을 못 받아 밤일을 하셨던 그 목회가 아버지 인생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일기는 매일 ‘Sola Gratia, Sola Fide’(오직 은혜, 오직 믿음)로 끝을 맺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일기를 읽다가 하나님께 무릎 꿇고 서원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어요. 나 목사 할께요.”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늦기 전에 말을 해야 합니다. 내일이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50년 세월이 흘렀어도 아무 말씀 없이 새벽에 아들을 기다려 주셨던 아버지 그 사랑이 더욱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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