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전례 없는 방대한 정보 접근성을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기본적인 사실이나 사건에 대해 이토록 분열된 적은 없을 것 같다.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 미국의 일련의 사건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많은 사건들도 우리의 이러한 상황을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같은 태풍, 백신, 경제 지표가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정치적 성향이 현실 자체를 해석하는 주된 렌즈가 된 기묘한 시대에 도달했다.
이것은 단순히 정책 해결책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아니다. 이전 세대 역시 사실에 대한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보 접근성과 전파 속도가 지금보다 느렸기 때문에 합의된 사실이 더 명확하게 보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 사실인지조차 합의하지 못한다. 고용 증가를 보여주는 연구는 경제적 승리의 증거가 되거나 통계 조작이 된다. 요즘 미국 전역에 일어났던 시위들은 정의로운 봉기가 되거나 폭력적 혼란이 된다. 기후 데이터는 긴급한 경고로 읽히거나 진보의 히스테리로 읽힌다. 이 현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인류지식의 거의 모든 영역을 가로지른다는 점이 새롭다.
크리스찬으로서 이 글을 쓰고 있기에 이성과 신앙이라는 측면을 보았다. 한국이나 미국의 적지 않은 크리스찬들이 그들의 정치성을 신앙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많은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이 특정 정당의 정책을 신앙의 연장으로 해석하거나, 한국에서 일부 교회가 정치적 이슈에 대해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지지하는 경우는 그러한 노력으로 여겨진다. 특히 놀라운 점은 정치적 성향이 이성과 신앙, 인간의 확신을 위한 두 가지 전통적 원천을 모두 초월한다는 점이다. 합리성과 과학적 사고를 자랑하는 사람들도 종종 종교적 신념에 이끌리는 사람들 만큼이나 취약하다. 이는 학력 수준과 무관하게 나타난다. 박사 학위 소지자들도 고등학교 중퇴자들과 똑같은 무의식적 편향으로 데이터를 분석한다.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 그들의 정치적 부족(political tribe)에서 새로운 종교를 발견한 듯하다. 그것은 모든 질문에 즉각적인 답을 제공한다: 우리 편은 뭐라고 말하는가? 이러한 부족적 인식론은 기묘한 전도(strange inversion)를 만든다.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치적 견해를 형성하는 대신, 이제 우리는 정치적 견해를 바탕으로 세계를 이해한다.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되었다. 정당 정체성이 토대가 되고, 과학, 역사, 경제학, 심지어 신학까지 모든 것이 그에 맞춰 재조정된다. 심지어 상식의 해석에 혼동을 일으킨다.
정치 쟁론적인 사건이나 사실들을 인류애적이나 평화적이나 상식적으로 보질 않고 누가 그렇게 말하느냐 하는 것에 더욱 집중하고 더욱 합리화하려고 있는 것이다. Pew Research (2022)에 따르면, 미국인의 65%가 강한 정당 간 갈등을 인식하며, 이는 종종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일치하는 뉴스 출처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이와 유사하게 한국에서도 특정 정당 지지층이 보수 또는 진보 성향의 언론사를 선호하는 현상이 관찰된다. 이는 서로 다른 현실에 사는 듯한 분열을 초래합니다. 결과는 심각하다. 정치적 성향이 무엇을 진실로 인식할지 결정할 때, 타협은 불가능 해진다. 땅 자체에 동의할 수 없는데 어떻게 중간 지점을 찾을 수 있겠는가? 전문가들이 즉시 우리 편과 저쪽 편으로 분류될 때 전문가의 합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정치적 선입견과 모순되는 증거는 편향적이라고 일축되고, 우리 믿음을 확인하는 증거는 출처 품질과 무관하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마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과정이 얼마나 보이지 않게 되었는가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명료하게 생각하고, 증거를 따르며, 객관적으로 남아있다고 믿는다. 이데올로기에 눈이 먼 것은 항상 상대편이다. 자신의 편향에 대한 이 맹목성이 문제를 거의 해결 불가능하게 만든다. 볼 수 없는 것은 고칠 수 없다.
아이러니는 쓰라리다. 그 어느 때보다 정보, 전문성, 다양한 관점에 대한 접근이 풍부한 시대에, 우리는 덜 보기로 선택한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보다 우리 편의 확신이 주는 안도감을 선택한다. 그렇게 우리는 단지 반대자와 동의하는 능력뿐 아니라, 공유된 현실을 이해하는 능력을 잃고 있다. 이 쓰라린 아이러니를 넘어, 열린 대화와 비판적 사고를 통해 정치적 부족주의의 장벽을 허물고 진실에 다가가는 첫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