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 연방 법무부가 지난 달 말 미성년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과 관련한 300 만 페이지 이상의 수사 기록을 공개한 지 2 주가 지났지만 그 여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정·재계와 학계, 연예계를 아우르는 이른바‘엘리트’ 인사들의 이름이 문서 곳곳에서 확인되며 파장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존자들과 인권 옹호 단체들은 보도의 초점이 사건의 본질보다 유명 인사들의 연루 여부에 맞춰지면서 정작 성폭력 피해자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메리칸커뮤니티미디어(ACoM)가 지난 13 일 주최한 온라인 언론 브리핑에서 법학자와 현장 활동가, 성매매·인신매매 생존자들은 엡스타인 사건을 계기로 수사와 재판 과정 전반을 피해자 중심으로 재설계하고, 구조적 불평등이 고착된 사법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조지타운대 헌법학·글로벌보건정책 교수인 미셸 굿윈 박사는 이번 사안이 미국 사회가 오랫동안 성폭력 피해자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해 온 현실을 드러낸다고 비판했다. 또 보이지 않는 권력과 폭력이 피해자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구조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 예로 일부 공개 문서 일부에 피해자의 이름과 심지어 사진이 충분히 가려지지 않은 채 포함된 점을 언급하며“법의 존엄성과 기본적 인권에 대한 고려가 결여된 조치”라고 지적했다.
엡스타인은 2019 년 연방 성매매 혐의로 재판 중 구치소에서 사망했다. 그는 2008 년 논란이 된 플리바게닝(유죄협상)을 통해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의 오랜 동료 길레인 맥스웰은 이후 성매매 관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날 브리핑에서 제시된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인신매매 사건 가운데 유죄 판결로 이어지는 비율은 1%에도 못 미친다. 굿윈 교수는 특히 공소시효가 아동 피해자들의 사법적 구제를 가로막는 핵심 장벽이라고 요구하며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알렸다. 그는 “많은 주에서 미성년자 피해자가 성년이 된 이후 제소 기간을 제한하고 있어 어린 시절 학대를 겪은 이들이 법적 절차에 나서기에는 현실적으로 큰 제약이 따른다”고 설명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 있는 서바이버저스티스센터의 카르멘 맥도널드 대표는 인신매매는 결코 특정 유명 인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고위층이 연루된 사건이라 주목받고 있지만 지역사회 곳곳에도 유사한 범죄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맥도널드는 LA 카운티가 전국에서도 아동 성착취가 빈번한 지역 중 하나라며 특히 이민자 피해자들이 추방에 대한 두려움과 언어 장벽, 과거 강요된 범죄 전력 등으로 신고를 꺼리는 현실을 전했다. 인신매매 피해자를 위한 T 비자 등 법적 보호 장치가 존재하지만 최근 강화된 이민 단속 분위기 속에서 이를 활용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체류 신분을 협박 수단으로 삼거나 허위 신고로 보복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휴스턴에 본부를 둔‘노트래피킹존(No Tra;icking Zone)’공동 설립자 재클린 알루오토는 “인신매매는 연간 2450 억 달러 규모의 글로벌 산업”이라며“인신매매는 오랫동안 고수익을 내면서도 처벌 위험이 낮은 범죄였다”고 규정하고 강력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 단체는 텍사스에서 학교와 대학 인근에서 발생하는 인신매매를 1 급 중범죄(25 년 이상 최대 99 년형)로 처벌하도록 하는 법안 통과에 기여했다. 알루오토는 텍사스 생존자를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55%가 학교와 관련된 환경에서 처음 접근을 받았다는 결과를 소개하며, “취약한 지역의 청소년을 노린 방식이 광범위하게 작동하고 있다. 신고 초기 단계부터 체계적인 대응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 인신매매 대응 자문위원회 전 위원인 코트니 리트박은 17 세 때 약 3 년간 성매매 조직에 의해 착취된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 그는 고교 시절 다른 성범죄를 신고한 뒤 표적이 됐고, 이후 여러 주를 오가며 조직적 착취를 겪었다고 밝혔다. 리트박은“수사기관이 사건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아무도 너를 믿지 않는다’는 가해자의 거짓말이 사실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또한 인신매매가 마약·무기 밀매, 자금세탁 등과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들에게 완벽한 증거 제시를 요구하는 현재의 구조 자체가 재검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도널드 대표는“피해자가 왜 즉시 신고하지 않았는지를 따지기보다 정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마련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굿윈 교수 역시 공소시효 연장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명확한 법적 절차 마련 등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엡스타인 파일 공개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구조적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라며“이 기회를 실질적 개선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