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스마트폰을 집에 놓고 나갈 때가 있다. 그때마다 왠지 마음은 허전하고 긴장된다. 배터리가 5% 남짓 남았을 때도 약간의 불안감이 생긴다. ‘배터리가 방전되서 중요한 연락을 놓치면 어쩌지?’ 사실 당장에 죽고사는 긴급한 연락은 없었다. 스마트폰은 이미 삶의 일부가 되었다. 현대인들의 스마트 폰에 대한 애착은 강박에 가깝다. 스마트폰 중독이 요즘 심각한 수준까지 와있다고 정신과 의사들이 입을 모은다. 토론토에서 만난 한 정신과 의사는 ‘목사님, 중독(Addiction)현상이 너무 심각해 큰일입니다’ 라고 걱정을 한다. 과거에는 중독하면 알코올이나 마약 같은 특정 물질을 떠올렸지만, 이제 중독적 삶(Addictive behavior)은 일상이 되었다. 유튜브 쇼츠, 틱톡의 끝없는 스크롤, 밤샘게임, SNS의 ‘좋아요’에 대한 갈망등…. 중독에 대해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일중독, 온라인중독, 성중독, 온라인 쇼핑중독, 관계중독, 종교중독, 물질(돈)중독..… 중증은 아니더라도 중독은 일상을 파괴하며 진정한 관계를 깨뜨진다. 마음의 배터리가 방전되면 중독으로 미끄러진다. 마음의 대화가 사라지니 관계의 깊이는 얄팍하고, 공동체의 힘은 약해진다. 틈만 나면 고개 숙인 채 스마트 폰만 쳐다본다. 스마트폰 중독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중독은 위험하다. 중독이 지속되면 뇌회로가 고장나 끈임 없이 보상을 요구하며, 쾌락(도파민호르몬- 과다분비)만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중독이 깊어지면 정상적인 신앙생활, 학교생활이 지루해진다. 일상의 삶이 지루해 견디기 어려워진다. 최근 한국청소년의 42%는 조절이 어려운 심각한 수준으로 조사된 바가 있다. 중독에 빠지면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Addicere-노예상태)가 된다. 스스로 선택했기에 금방 끊을 수 있다고 믿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중독에 빠지면 신앙의 성장, 건강한 관계가 어려워진다.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에 정신적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상의 중독, 모든 중독은 파괴적이다!
성경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수가성 여인은 오늘날 가장 현대적인 ‘중독자’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이미 네 명의 남편을 거치고 다섯번째 남자와 살고 있다. 불안함, 두려움, 죄책감에 사람들과 만남을 꺼린다. 중독은 사람을 공동체로부터 고립시킨다. 새로운 만남도 금방 익숙해지면서 지루함 때문에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뇌과학으로 보면 ‘내성(Tolerance)’때문이다. 처음에는 작은 자극에도 기뻤지만 뇌는 금방 익숙해진다. 더 강한 자극, 더 많은것, 더 새로운 것, 더 안전지대를 찾는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마음은 늘 결핍뿐이다. 우리가 큰 자극이 없더라도, 다소는 지루해 보여도 일상의 삶에 감사할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요 그는 건강한 사람이다. 감사한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면 중독에 빠지기 십상이다. 수가성 여인에게 있는 목마름이 “관계중독”이라면…. 우리 역시 그 무엇을 갈망한다. 돈, 성, 명예, 지위, 권력, 사람들의 인정… 우리의 갈망이 하나님이면 좋겠지만, 하나님외에 무엇인가를 갈망한다.
진정한 사랑과 건강한 관계속에 있는 사람은 중독에 잘 빠지지 않는다. 외로움과 마음의 고통을 손쉽게 해결하려 할 때 중독의 늪에 빠진다. 그러면 현실에서 더 고립되고, 더 도망간다. 가족치료의 대가 버지니아 사티어(Virginia Satir)는 인간에게는 ‘자존감’이라는 그릇이 있다고 말했다. 이 그릇이 깨져 있으면 아무리 좋은 사랑과 물질을 부어도 밑 빠진 독처럼 다 새어나간다. 수가성 여인의 “마음그릇”은 이미 반복된 이별과 고립,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자존감이 산산조각 났다. 가족 내에서도 소통이 단절될 때, 아이들은 부모의 잔소리를 피해 게임속으로, 어른들은 현실의 무력감을 잊기 위해 일 중독, 종교중독, 분노중독(아드레날린), 알코올이나 주식투자로… 여러가지 방식으로 “현실에서 도망친다.” 중독은 지루함과 고통을 잊기 위한 처절한 일종의 진통제(Painkiller)인 셈이다. 여기에 우리 예수님의 처방은 파격적이다. 그분은 당시의 금기(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만나는 것,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를 깨고 먼저 다가가셨다. 친구처럼 “물을 좀 달라”로 다가가서 “안전한 관계” 속에서 수가성 여인을 무조건적으로 수용(Unconditional acceptance)하셨다. 또 마치 의사가 수술을 위해 환부를 드러내듯,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문제를 직면하게 하셨다. 그녀가 의존하던 관계중독, 가짜 신(Fake God- 우상)을 드러내신다. 치유를 원한다면, “내가 목마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마음이 아픕니다”, “내 힘으로는 조절할 수 없습니다” 라는 정직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뇌는 단순히 ‘하지마’라는 금지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중독의 문제는 “내 의지의 문제”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나의 전존재를 주님께 내어드리며 항복할 때(Surrender), 치유가 시작된다. 중독보다 더 강력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들어와야 중독적 습관이 밀려 나간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는 외부의 자극에 의존하지 않는다. 수가성 여인은 생수를 마시고나니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마을로 달려가 예수를 증거했다.내면에서 솟아나는 성령의 생수,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면 목마름은 해결된다. 마음에 근원적인 평안과 사랑을 누릴 때 비로서 중독이 끊어진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중독에서 자유하게 하셨다. 그 은혜가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